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그의 이야기.
고산자는 평민출신 김정호의 호이고 약1800년대 조선후기 인물로 추정된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로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리학자 김정호는 후세에 알려진것이 별로 없다. 출생과 사망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뛰어난 작품을 수많이 남겼음에도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여러 부분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픽션이라 생각하고 감상해야 한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영화 '은교'로 알려진 소설가 박범신의 소설 '고산자'를 원작으로 한 강우석 감독 작품으로 사실로 메울 수 없는 기록의 여백을 역사적 배경에 맞게 상상력으로 재구성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지도 '대동여지도’. 그 완벼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자신의 발로 직접 밟으며 지도를 만들었다. 오로지 백성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김정호의 마음은 바로 쓰이지 않았고 김정호는 흥선 대원군과 고위 관리들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것을 막으려고 암투를 벌인다. 구글 검색만 해도 온세상을 책상 앞에서 볼 수 있는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지도가 곧 권력이자 목숨이 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했던 김정호. 영화를 좀 더 즐기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알아보자면, 현존하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목판본일 뿐만 아니라 22첩으로 구성된 절첩식 지도이다.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을 만들고 또 동서로 80미리 간격을 한 면으로 만들어 두면이 한판으로 구성되도록 각 층의 판을 병풍식으로 접어 첩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축적을 이용하여 1척이 100리, 1촌을 10리로 하는 '백리척'을 이용한 축적지도이며, 역, 산성 등을 독자적인 기호로 표시했다. 특히 산줄기의 굵기로 산의 크기와 높이를 짐작하게 하는 등 실학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들어간 것이 특징이라 한다. 백성들이 이 지도를 잘 이용하도록 애쓴 김정호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강우석 감독은 9개월에 걸쳐 최남단 마라도부터 최북단 백두산까지 전국 팔도 강산을 돌며 촬영하였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우리 강산에 놀라고 그 영상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영화였다.
길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기리고차로 실제 거리를 재기 위해 대원군과 고종의 행렬에 행차 수행원인냥 위장하여 뒤를 따라다닌 김정호(차승원)의 모 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어릴적 김정호의 아버지는 외척을 몰아내는 홍경래의 난 진압을 위해 지원대에 나섰는데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 마을 사람들과 잘못된 지도 한장을 믿고 산맥인 줄 모르고 산을 오르다 사람들과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나라에서 지급되는 이 지도엔 고작 산 하나만 표기해 놓았으니 산맥이 아니라 단순한 산 인줄 알고 올랐던 것이다. 아버지를 그렇게 잃었기에 직선거리로 표시되는 지도의 거리가 실제로 산이 존재할 때엔 3배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해서 불편을 느끼는 백성들이 더욱 더 안타까웠던 김정호였다. 최소한 몇리나 걸어야 할지 얼마나 가야할지 알아야 짚신이라도 맞게 챙겨오지 않겠냐며 지도 제작에 위해 길을 떠난다. 3년이 넘는 시간을 조선 팔도를 떠돌며 지도를 그리던 김정호는 지나가는 곳마다 돌에 지역명을 새겨서 간직하고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김정호의 지도는 그 당시 흥선대원군(유준상)과 안동김씨 수장 김좌근의 주목을 끌게되어 김정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흥선대원군은 김정호의 지도로 자신의 이득과 권력을 취하려 하고 흥성대원군이 그런 싫었던 김좌근은 그 지도를 갖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다들 김정호의 목판 지도를 원하니 김정호는 백성을 위해 쓰려는 그 목적과 달리 쓰이는 것이 염려되어 숨기려고 애를 쓰고 김좌근은 자신의 선산에서 나무베기를 핑계삼아 작업 중이던 김정호의 목판을 압수하고 김정호는 관아로 끌려가게 된다. 울릉도의 우산도 지형을 그리기 위해 떠난 김정호는 외구선박의 어부들에게 지도를 뺏기고 목숨만 겨우 건져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사이 나라가 박해하던 천주교를 믿었던 딸이 관아로 끌려가버렸다. 딸을 살리기 위해 흥선대원군과 김좌근을 찾아가 빌지만 지도를 내어주지 못한 김정호. 딸을 결국 죽음으로 몰게된다. 그는 죽은 딸의 봉분을 그 돌로 만들어 주며 오랜시간 집을 떠나 자신의 딸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고 우산도를 마저 그리러 길을 떠난다. 장사를 하거나 무역을 하는 백성들은 꼭 필요했던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 싶었던 김정호는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공개하고 길을 떠났다고 하는데 남아있지 않은 그의 기록때문에 지도를 통한 민주화를 꿈꿨던 기록자 김정호가 더욱 더 안타까운 이유이다.